오래전 한국을 떠났던 한 외국인의 눈물이 여러 논란을 낳고있다. 그는 과거에 그럴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눈물을 섞어 대중들의 감정에 호소하였다. 그러나 감정표출을 받아줄 상대를 잘못 골랐으며 눈물이라는 도구도 잘못 골랐다.
뼛속 깊이 배신감을 맛 본 국민들과 정부에게 배신의 기간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을 할애한 참회 혹은 핑계의 노출은 오히려 무관심했던 대중들을 또다시 뜨거운 공론의 장으로 끌어들인 효과를 발휘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모 정치인을 끌어들인 것은 최악의 선택이라 할수있다. 상대와 논점을 잘못 선택했다고나 할까, 준비된 전사를 싸움에 끌어들인것이다. 그는 노련한 변호사이며 그의 소신과 맞지않는 부조리와는 타협없이 싸워온 투사이다. 또한 그는 현 시점에 있어서 정치적 아젠다의 중심에 자리하는 무게감 있는 정치인으로 자리매김 하고 있는 중이기도하다.
이런 그를 상대로 준비도 부족하고 명분도 없는 싸움의 전선을 옮겨버린것은, 눈물을 통해 주장한 온갖 핑계와 참회의 논리들이 모순 투성이였음을 더욱 확연하게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가 흘린 눈물 역시 진정성을 논하기에는 대중들에게까지 그 염도가 전해 지지는 않은 듯 하다.
언제부턴가 물의를 일으킨 유명인들. 특히 연예인들의 참회와 반성의 통과의례로 자리잡은것이 '눈물의 기자회견'이다. 눈물은 슬픔, 아픔 혹은 기쁨과 동반되기도 하지만 억울함을 표현할때 쓰이기도 한다. 특히 한국의 남자에게 있어서 공개된 자리에서의 눈물은 금기시 되어왔고, 남자답지 못함의 상징으로 자리잡혀있다. 그러기에 유명 남자들의 눈물 특히 물의를 일으킨 유명인들의 눈물은 대중들로 하여금 뉘우침의 아이콘으로 받아들여졌고 용서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이벤트를 통한 반성의 진정성을 받아들이는 것은 철저히 대중들의 몫이며 선택인것이다. 참회와 눈물이 통과의례가 되어버렸다고 느끼는 대중들이 많아져 그야말로 다중이 되어가고 있다. 물의에 대한 후속조치가 누구나 예측 가능한 루틴으로 자리잡혀 있다면, 이러한 참회의 이벤트는 그 진정성을 의심할 수 밖에 없을것이다.
과연 눈물과 무릎 꿇는거 외에는 방법이 없었을까? 그리고 지난 10여년간 기회가 없었을까?
동네의 든든한 형 같은 미국의 뒤에 숨어 있는 모습은, 굳이 제국과 주변부 국가의 불평등한 관계를 유추하지 않더라도, 권리를 가진자의 소신있는 선택이라 할것이다.
그렇지만 국가로부터 부여되는 의무를 아무런 힘없이 말없이 감내해야하는 이 땅의 다중들은, 그를 이방인으로 외국인으로 대할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다중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기에는 지난 10여년이 터무니없이 짧았을까?
그동안 속에 품어 놓고 잊지 않은 다중들의 속 좁은 마음이 문제인 것인가?
아니면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더욱 얼어붙게 만든것이 문제인 것인가?
진정한 진정성(?)은 사람을 움직이게 하기 마련이다. 단 한번의 대형 이벤트로 만회되기도 하겠지만 상대와 소통하려는 노력이 수반되어야 하고 그것은 상처의 무게 만큼이나 무거운 시간과 세월이 필요한 법이다.
진정으로 이 나라에서 대중들과 호흡하고 싶었다면 지난 십수년간 바닥부터 닦아 올라와 그 마음이 전달 되었어야한다. 전달된다는것은 다중들이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우리나라에 발을 딛건 딛지 못하건 관심이 없다. 다만 눈물과 무릎 그리고 일방적 호소로 진정성을 논하지 않았으면 한다. 되지도 않는 전쟁을 위해 전선을 만들고 유지하는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지금처럼 든든한 제국의 우산 아래에서 비를 피하며 살아가는 것이 편할것이다.
이 땅에는 우산은 커녕 비를 온 몸으로 감수 해야 하는 젊음들이 많이 있다. 그가 감수할 수 있다고 믿고 싶은 잠시 피하면 지나가는 소나기라고 오해하지 말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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