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hape of Water

 

물거품이 된 인어공주, 엘라이자로 환생했나

 

언제부턴가 영화를 보면 초반에 나오는 장면들이나 대화를 사진 찍듯 저장하게 된다. 생각 없이 지나친 장면이나 대사가 영화의 대미를 장식하는 반전이나 사건을 해결하는 복선이 될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끝까지 복선의 단서만 쫓다 영화 감상을 망친 적도 있다.




 

이 영화에서도 초반에 눈을 사로잡아 마지막까지 복선을 기대케 한 장면이 있다. 엘라이자 출근길 버스정류장에서 커다란 사내가 들고 있던 풍선과 케이크가 그것이다. 누군가를 축하해 주러 가는가 했는데 버스에 오를 때 보니 한 조각이 비어있는 케이크. 엘라이자가 내릴 때는 풍선만 버스 천장에 붙어 있고···. 이 장면이 복선이라 믿고 끝까지 보았건만 해결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상징하는 것일까? 한 조각이 비어있는 케이크와 버스에 남은 풍선이 마지막까지 마음에 불길하게 남아있었다.

 

엘라이자는 이야기를 보여준다

 

말을 못 하는 여주인공이지만 목소리 대신 다른 것으로 들려준다. 아니 보여준다. 그녀의 정체성, 복선, 상징들···.

 

대사에도 나오듯 에스포지토라는 성()은 고아를 은유한다고 한다. 이탈리아에서 고아원에 버려진 아기에게 에스포지토라는 성을 붙이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고아로 자랐지만, 주변에는 그녀를 이해하는 친구들이 여럿 있다. 수어까지 배워 대화를 나누는 화가 자일스와 동료 젤다. 엘라이자를 측은하게 생각하기보다는 오히려 믿고 의지하는 모습에서 그녀의 따듯함과 강인함을 엿볼 수 있다.

 

이런 그녀를 상징하는 장치로 물을 많이 사용했다. 일어나자마자 욕조에 물을 받고 달걀을 삶으려 물을 끓이고. 심지어 물속에서 자위까지···. 아마도 물과 유대감이 깊고 자기에게 연민이 많다는 표현을 그렇게 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일까 일하다가 우연히 보게 된 그 생명체. 물속에 갇혀있는 그를 연민과 유대의 눈으로 바라본 것은 아닐까? 다른 이들은 괴생명체 혹은 동물로만 바라보지만, 엘라이자는 그녀의 방식으로 소통을 이어간다. 마침내는 둘이 물속에서 하나가 되고.

 

엘라이자는 구두를 사랑한다. 신발장에 고이 모셔둔 구두를 골라 멋진 구둣솔로 닦는 표정과 구둣가게 진열장을 보는 모습이 행복해 보인다. 집을 나서며 텔레비전에서 본 춤을 따라 출 때 들리는 구둣발 소리는 말 못 하는 엘라이자가 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소리일 수도. 그렇다면 말은 못 하지만 걸을 수 있고, 티브이에 나오는 춤을 따라 출 수 있는 두 다리를 사랑하는 것은 아닐까? 사랑하는 두 발에 주는 선물이 예쁜 구두. 그래서 그런지 엘라이자의 모든 동작이 무용처럼 보였다. 청소하며 걷는 모습도, 수조의 생명체를 바라보며 다가가는 모습도. 구두를 사랑하는 여인으로 보여주려 했다기보다는 움직이는 다리를 강조하기 위해 구두와 발소리를 이용한 느낌이었다. 두 다리를 돋보이게 한 장치?

 

가장 눈에 띈 복선은 그녀의 목에 난 상처다. 사선으로 난 모습이 누군가가 혹은 동물에게 할퀸 상처로 보였다, 그러나 내게는 혹시? 라는 생각이 들게 했고, 마지막에 역시! 라는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영화를 본 사람들은 다 목격했으리라. 마지막 그 장면에서 엘라이자는 호흡이 돌아왔지만, 나는 숨이 멈추는 줄 알았다. 맞다, 그렇다면?

 

엘라이자는 오래전 육지의 왕자를 사랑하다 두 다리와 목소리를 맞바꾼 인어공주인 건가? 말은 못 하지만 두 다리를 사랑하는 엘라이자의 모습이 이해가 간다. 물거품으로 사라졌지만, 그 사랑 이루지 못한 상처를 신이 어루만져 주려 했는지 남미 원주민들이 신으로 추앙한 그 생명체로 인도한다. 굳이 과학을 따지는 사람들은 양서류 인간이라고 하겠지만, 엘라이자에게는 멋진 존재 그 자체다. 자기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는 그대로 이해해주고 존중해주는. 그 생명체에게도 그녀는 있는 그대로 이해해주는 소중한 존재일 것이다. 두 존재는 다름에서 같음을 볼 수 있는 연민과 연대로 뭉쳐서 사랑을 느끼게 된다. 서로에게 선물이었을까? 행복했을까?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을까?

 

우리는 동화에게 해피엔딩을 요구한다. 아무리 결론 내고 결말을 보여줘도 독자는 그 이후를 알고 싶어 한다. 동화의 덕목은 아름다운 결론, 혹은 슬픈 결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 독자가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결말 이후의 후일담일 수도 있고, 교훈일 수도 있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엔딩크레딧 이후를 생각하는 건 관람객의 몫으로 남겨둘 때 여운이 깊게 남는다. 이 영화의 마지막도 그랬다. 둘이 행복하게 오래 살았을지 아닐지는 내게 남겨주었다. 마지막 나레이션이 끝나고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 물거품으로 사라진 인어공주를 가슴 아파했던 어린 시절의 내가 떠올랐다. 그리고 고마웠다.

 

그 불쌍한 공주가 그렇게 갖고 싶었던 두 다리를 마음껏 사랑하게 해주어 고마웠고. 목소리는 잃었지만 중요한 것은 목소리를 갖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내는가가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어 감사했다.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이해받는 게 그렇게 행복한 것임을 알게 해주어 고맙고. 많은 관람객이 차별과 차이를 얘기하게 해주어 감사하기도.

 

엘라이자의 이웃 자일스는 그림으로 차별의 사회와 소통하고자 했다. “Future is There!” (혹은, here) 라고 적혀있는 그의 그림이 열린 창이 되어 스크린 밖에서 영화를 보는 우리에게 외친다.

 

어이, 거기 앉아 있는 미래의 사람들. 거기는 좀 괜찮아진 거요?”

 

사족 한 문단. 젤다의 남편이 평생 못 본체 살고, 입 닫고 살다가 위기에 처하니 한마디 하는 장면에서 지금 우리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평생 목격하고도 못 본체 살다가 봇물이 터지니 이제야 함께한다는 그 많고 많은 입···.

 

 

Posted by vagabund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