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오리와 짝을 이룬 야생오리
탄천 산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작년 가을 수내동 ‘습지생태원’ 근처에서 한 오리를 보았다. 갈색 흰뺨검둥오리와 초록색 청둥오리 사이에서 유독 튀는 하얀 색깔의 오리. 물에 떠 있기보다는 풀밭에 올라가 배를 깔고 햇볕을 쬐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오리 맞나? 라는 생각이 처음에 들었지만, 색깔 외에는 모양새가 탄천의 다른 오리와 별반 다르지 않아 오리겠지? 라고 생각했다. 다만 새 도감의 오리 항목에는 하얀 오리가 없어서 야생오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럼 집오리인가? 집오리가 탄천에 왜?
이 하얀 오리 옆에는 다른 오리 한 마리가 항상 붙어 있었다. 멀리서 봐도 알아볼 수 있는 청둥오리 수컷이다. 둘이 꼭 붙어 있는 걸 보아하니 하얀 오리는 암컷? 둘이 커플인 건가? ‘야생오리와 집오리의 만남’이 내 호기심을 자극했다.
새들을 관찰하다 궁금한 게 생기면 참고 문헌을 찾아보곤 했다. 전문가가 일반인을 위해 쓴 책이나 인터넷에 올라온 자료들이다. 이번에도 뒤지다 보니 가축화된 오리의 원종이 청둥오리라는 기록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었다. 야생오리인 청둥오리와 집오리가 커플을 이룰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선미의 동화 <마당을 나온 암탉>에서 주인공 ‘잎싹’의 친구인 청둥오리 ‘나그네’가 집오리로 추정되는 ‘하얀 오리’와 아픈 사랑을 나눴듯이 말이다.
탄천의 하얀 오리와 청둥오리도 커플인 건가? 지난 주말 탄천을 헤엄쳐 다니는 두 오리를 보았다. 하얀 오리가 앞서고 청둥오리가 뒤따르고. 청둥오리가 앞서면 하얀 오리가 뒤따르는 풍경. 흰뺨검둥오리가 다가오자 큰 날갯짓으로 쫓아버리는 청둥오리의 행동도. 전형적인 수컷 오리의 모습이다. 다른 수컷으로부터 자기 암컷을 지키는 행동.
탄천에서 새들이 살아가는 모습에서 인간 세상의 모습을 투영해 볼 때가 있다. 일부러 대입해 보는 것이 아닌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차가울 때가 있는 반면에 따뜻한 순간도 있다.
같은 오릿과라도 수면성 오리와 잠수성 오리는 먹이가 다르다. 왜가리, 중대백로, 쇠백로 등 백로들도 좋아하는 먹이가 종에 따라 다르다. 다양한 종의 철새들이 많이 엉켜 사는 큰 하천이나 호수에서 큰 다툼이 생기지 않는 이유다. 철새들이 많이 찾았던 지난겨울 탄천에도 종간의 대립을 보진 못했다. 오히려 같은 영역에 함께 머무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철새들이니 날 풀리면 떠나겠지? 라고 생각했을까? 사실 봄이 깊어가는 지금 많은 물새가 떠났다.
집오리와 야생오리가 함께 사는 모습에서 인간의 모습이 떠올랐다. 외모만큼이나 다른 습성과 유전자를 이어받았을 두 오리가 마치 서로를 이해하듯 사는 모습이 인간들에게 가르침을 주는 듯했다. 내게는 생각 거리를 주었고.
집오리는 날지 못한다. 오래전 인간들이 사육하기 위해 날개를 상하게 했고 그 유전자가 대를 이어 내려왔다. 청둥오리는 철새다. 겨울을 피하고자 수천 킬로미터를 날아다니는 새다. 공중을 나는 새와 날지 못하는 새가 만났다. 그래서인지 둘은 주로 뭍에서 햇볕을 쬐거나 물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헤엄만 친다. 청둥오리가 나는 것을 보지 못했다. 물론 내가 안 볼 때 날 수는 있겠지만. 날지 못하는 오리의 영역은 좁을 수밖에 없다. 사랑을 위해 날기를 포기한 걸까? 날지 못하는 새는 자기를 보호할 방패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천적이 다가왔을 때 땅을 박차고 날아오르는 것이 최선이 방어일 텐데.
집오리는 누군가의 집에서 왔을 것이다. 탄천에 늘어가는 ‘붉은귀거북’처럼. 시장에서 사 와서 키우다가, 혹은 부화 실험하다 태어난 새끼를 더는 키우지 못하고 탄천에 두었을 것이다. 물론 혼자 걸어오지는 않았겠지. 청둥오리는 어디선가 날아왔을 것이다. 추운 나라에서 겨울을 피해 가족과 내려왔든지, 저기 저 한강 어디쯤에서 터 잡고 살다가 탄천이 물 좋단 소문 듣고 왔겠지.
버림받아 하루하루가 무서웠을 집오리에게 다가간 청둥오리. 탄천에는 청둥오리 무리가 많았지만 선택한 하얀 오리. 어쩌면 무리에서 짝을 찾지 못해 눈을 돌린 걸 수도 있다. 그들이 만나게 된 경위야 어떻든 둘이 물 위를 헤엄치고 풀밭에서 햇볕 쬐는 모습은 경이로울 정도로 아름답다.
인간들은 자기와 다른 모습이나 생각을 적대시하며 산다. 왜 저들이 나와 같지 않을까? 라는 마음. 물론 나도 저들이 나처럼 변했으면 했지, 내가 저들처럼 되고 싶지 않을 때가 더 많았다. 프레임에 종속된 생각과 행동이 계속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나란한 두 궤도를 날고 있는 우주정거장과 우주선? 교대할 우주인과 보수 장비를 실은 우주선은 우주정거장에 가야만 한다. 그러나 나란한 궤도를 나란히 달리는 둘은 영원히 만날 수 없다. 마치 척력(Repulsive Force)이라도 있는 듯이. 자석의 같은 극끼리 붙이려는 듯이.
탄천의 청둥오리와 집오리가 함께 사는 힘은 이해와 양보 때문 아닐까? 상대의 습성을 이해하고 자기의 습성을 양보하는 마음. 차이를 극복하고 오순도순 사는 모습을 보며 잠시 인간을 돌아보았다. 봄이 깊어가니 둘의 결실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