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소공녀> 리뷰
옛친구를 찾아 나선 CRUISE
CRUISE, 주인공 미소가 활동했던 밴드다. 대학 시절로 생각되지만, 정확히 언급되지는 않았다. 다만 예전에 즐겁게 활동했던 기억을 색 바란 사진으로 보여준다. 함께 모여 환히 웃으며 담배 피우는 사진. 그 안에선 모두가 개성 있는 복장과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어, 그들이 사는 현재는 과거와 아주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미소가 방을 포기해야 할 순간에 떠오른 그들에게 가는 여행. 밴드 ‘CRUISE’를 찾아 나선 여행, 크루즈. 머물 곳을 찾아 큰 트렁크와 낡은 봇짐을 들고 진, 여행 아닌 여행의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다. 계란 한판을 들고 떠난. 설마 30살 나이를 은유로 담은 걸까? 아니면 계란말이와 삶은 계란이 주는 상징을 숨긴 걸까. 한때는 밴드를 하며 같은 길을 걸어간 멤버들은 그들이 다룬 악기만큼이나 다양한 삶을 살고 있다. 미소와 계란은 그들에게 위로를 주기도 하고, 의도치 않게 상처를 주고받기도 한다.
꿈을 포기해야 사람답게 산다고?
과거 밴드로 함께 꿈을 좇던 그들은 미소를 제외하고는 모두 꿈을 포기하고 산다. 사람답게 살려고. 생활과 타협하며 밴드와 거리가 먼 삶을 산다.
베이스를 치던 친구는 큰 회사에 다니며 격무에 지친 피로를 직접 제조한 영양제 링거를 맞으며 푼다. 오래전 따둔 간호조무사 자격증이 가장 잘 배운 기술이라면서. 드럼 치던 후배는 아파트에 살고 싶어 한 부인이 떠난 후 한 달에 100여만 원씩 20년을 갚아야 하는 감옥에 홀로 갇혔다. 190만 원 월급을 받으면서. 키보드 치던 친구는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시집 식구와 남편의 무관심을 받으며 산다. 애지중지했을 키보드를 휴지통 위에 버린 듯 두고. 노총각 보컬 선배는 아들 장가보내기 위해 몸을 아끼지 않는 노부모와 함께 산다. 늙어가는 전립선을 안타까워하면서. 저택에 사는 기타리스트 언니는 감정이 급히 오르내리며 남편 눈치를 살피며 혹은 무서워하며 살고 있다. 그들이 밴드를 했다는 기억은 색 바란 사진으로만 남았다.
미소의 연인 한솔 또한 웹툰이라는 꿈을 포기하고 사우디아라비아로 날아간다. 꿈을 포기해야 사람답게 살 수 있다면서. 이별 장면의 롱테이크가 슬프게 다가왔다. 그 순간에도 어디 맡기지 못한 큰 트렁크와 낡은 봇짐을 들고 진 미소. 혼자 남겨진 모습에서 꿈은, 짊어지고 끌어야 할 삶의 무게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꿈을 포기한 연인과 친구들과는 달리, 차라리 집을 포기한 와중에도 놓지 못하던 위스키. 하루를 마감하며 달콤하게 넘기던 그 한 잔 값이 무려 2,000원이나 오른다는 소식에, 미소는 “위스키, 너마저!”라며 좌절한다. 영화 마지막에 그 좌절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나온다. 하룻밤 머물 방을 찾아 여행할 때도 놓지 않았던 그것. 일당을 받아서 그것을 사기 위해서 따로 적립할 정도로 소중했던 그것을 포기했다.
겹겹 껴입은 옷만큼이나 팍팍한 현실
가난한 연인은 오랜만에 사랑을 나누려 옷을 벗는다. 다른 영화라면 에로틱했을 장면이 짠하게 다가왔다. 겹겹 껴입은 옷, 옷, 옷. 기타리스트 언니는 레이어드룩이라 멋있다고 했지만, 미소는 추워서 껴입었을 것이다. 끝내는 추워서 사랑은 따뜻해지는 봄으로 미뤘다. 결론적으로 아직 추울 때 사우디아라비아로 떠난 연인과 따뜻한 체온을 나누진 못했을 것이다.
겹겹 벗어 던져도 나신이 되지 못하는 장면이 미소와 한솔로 대변하는 젊은이들이 떠올랐다. 벗어도 벗어도 벗어날 수 없는 굴레들. 취업난, 주택난 그리고 학자금 융자. 그래서 꿈을 포기해야 하는가요? 그러면 살만해지는가요? 라고 어른들에게 묻는듯하여 대답이 궁해진 마음으로 영화를 보았다.
그래서, 밴드에서는 무엇을 맡았을까?
밴드에서 미소가 맡았던 악기는 무엇이었을까? 영화에서 직접 얘기하지는 않는다. 다만 영화 속에서 혹은 관객의 관점에서 미소의 파트를 상상해 본다. 매니저였을까? 밴드에서 멋지게 튀는 보컬이나 기타, 베이스, 키보드, 드럼이 아닌 매니저. 무대 뒤와 공연 전후, 모든 곳과 상황을 매니지하는 매니저. 미소는 매니저였을 것이다. 그것도 무척 재미있게 즐긴, 진심을 담았던. 그래서 하룻밤을 청하는 미소에게 밴드 멤버는 나름 도움의 손길을 내어준다. 그들 방식으로. 물론 거절당하기도 했지만.
미소는 모든 사람에게 진심으로 대해준다. 사람들은 미소가 차려준 밥상에 감동하고, “밥, 먹었어요?”라고 물어보면 울컥한다. 요리와 질문에 진심이 담긴 걸 느낀 거다. 진심으로 살아가며 소박한 꿈을 놓지 못하는 미소에서 담배와 위스키를 앗아 버리려는 현실.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남들과 다른 결정을 해서라도 포기하지 않을 것 같다. 유능한 매니저는 모든 상황을 통제하며 어려움이 오더라도 돌파하니까.
도심을 가르는 강변에 친 오렌지색 텐트. 야경의 오렌지 불빛과 대비되는 그 모습. 실루엣으로 보아 미소가 택한 집으로 보인다. 스크린 왼쪽 아래에서 빛나는 텐트의 오렌지빛이 강 건너 빌딩의 불빛 못지않게 밝게 빛난다. 빌딩 숲의 빛은 밤늦도록 놓지 못하는 삶의 굴레일 테지만, 텐트의 오렌지빛은 겹겹 껴입더라도 포기하지 않을 젊은 날의 꿈일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