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레이디 버드> 리뷰
부모가 준 이름을 거부한 소녀, 자기의 이름을 찾아 여정을 떠나다
주인공 소녀는 부모가 지어준 ‘크리스틴(시얼샤 로넌 분)’이란 이름 대신 “Lady Bird”로 불리길 원한다. 왜 “인용부호”를 붙였냐고 물으면, 자기가 직접 불렀기 때문이라며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설명한다. 심지어 학교 게시판 공고문에 적힌 자기 본명 옆에 펜으로 직접 “Lady Bird”라고 적는 수고도 아끼지 않는다.
자기에게 붙인 “이름”이 중요한 이유는?
부모가 지어준 이름에는 그들이 바라는 ‘딸’의 정체성이 담겨 있다고 생각하는 소녀다. 고향 새크라멘토에서 공부 마친 후 취업해서 무난한 경제활동을 하며 평범히 살라는 부모의 바람이 담긴. 특히 엄마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믿는 소녀다.
그런 가정교육을 자기가 직접 지은 이름으로 불러달라며 반항한다. 그녀에게 이름은 정체성이다. 부모가 준 이름을 거부하고 부모가 살길 원하는 그런 삶도 거부하고 싶은 것이다. 소녀는 새크라멘토는 물론 샌프란시스코나 다른 서부도 아닌 뉴욕으로 가길 원한다. 뉴욕이 아니라면 동부의 다른 전통 깊은 대학이라도 가고 싶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성적도 모자란 듯하고 불황의 기운이 집까지 오는 분위기다.
“Lady Bird”?
영화에서 크리스틴이 “Lady Bird”로 불리길 원하는 자세한 설명이 나오진 않는다. 적어도 대사로는 그렇다. 다만 그녀의 주장과 행동이 그 의미를 충분히 보여주고 있으며, 단어의 의미에서도 유추해볼 수 있다.
“Lady”는 유럽에서 귀부인에게 붙이는 경칭이다. “Sir”처럼 이름 앞에 붙여서.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혹은 자기가 붙이고 싶다고 붙여지는 건 아니다. 사회, 경제, 정치 분야에서 영향을 준 사람 중에서도 엄선하여 권위를 가진 기관이(왕이나 의회) 붙여주는 칭호다. 물론 봉건시대의 유산이긴 하지만 존경과 명예의 의미로 해석해보자. 존경까지는 아니더라도 의견 가진 한사람으로 대우해 달라는 의미로.
“Bird”는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싶다는 의중이 반영된 건 아닐까? 동부로 가고 싶지만 여의치 않은 현실에 새라도 되어 날아가고 싶다는 염원을 담은. 새들은 모두 자기만의 목소리를 가졌고 개성 있는 울음소리로 노래한다. 크리스틴 또한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아서 분노한다. 그렇다면 들어줄 때까지 울리라. 소녀는 지치지 않고 우는 새를 닮고 싶었을 수도 있다. 산에서 들어보면 산새의 소리는 생각보다 멀리 간다. 이 나무에서 우는가? 보면 아주 멀리 있는 나무에서 울고 있다. 작은 새라도 의외로 큰 목소리로 산이 울리도록 울어대기도 한다. 크리스틴은 자기 목소리로 우렁차게 울고 싶었을 것이다. 내 얘기 좀 들어달라고.
‘Ladybird’는 ‘무당벌레’다. 두 단어를 붙이니 전혀 다른 뜻이 되었다. 그냥 곤충일까? 유럽 여러 설화에 ‘ladybird’가 나오는데 인간에게 도움을 주는 곤충으로 등장하고. 심지어 ‘동정녀 마리아’로 해석된다고도 한다. 뭔가 중의적 해석이 가능한 걸까? 감독이 심어놓은 복선? 마침 소녀는 카톨릭계 고등학교에 다닌다.
“Lady Bird Johnson”으로 불린 인물도 실제 있었다. 그녀는 미국의 27대 부통령이었던 ‘Lyndon B. Johnson’의 부인이었고, ‘존슨’은 32대 대통령이 되었다. 자세히 얘기하면, 존슨은 ‘케네디’가 대통령이었을 때 부통령이었고, 케네디가 암살된 후 대통령 자리를 이었다. “Lady Bird Johnson”은 부통령 부인으로 미국의 ‘Second Lady’였다가 대통령이 된 남편을 따라 ‘First Lady’가 되었다. 미국에서 부통령은 유사시 대통령을 대신하지만, 평소에는 그 존재감이 미미하다. 오바마 시절 누가 부통령이었는지 기억하는가? 트럼프 정부의 부통령은?
대통령과 ‘First Lady’가 주목받는 현실에 누가 부통령 부인인 ‘Second Lady’를 기억할까? 그런 그녀가 퍼스트레이디가 되었다. 조명 뒤에서 가려진 삶을 살수도 있었을 그녀가 조명이 자기에게 비치는 주인공의 삶을 살게 된 것이다. 감독은 이런 이야기도 숨겨 놓은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Ladybird’에 이은 두 번째 복선일까? 라는 생각.
깊이 들어갈 필요 없이, 직접 자기에게 붙여준 “Lady Bird”라는 이름은 “남들이 바꾸기 어렵다는 현실을 박차고 날아올라, 자기의 목소리를 내고 싶다”라는 소녀의 마음이 담긴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녀가 가고 싶은 동부는?
크리스틴에게 새크라멘토(심지어 캘리포니아의 주도인)는 물론 샌프란시스코와 캘리포니아를 포함한 서부는 답답해 비좁아 터진 세상이다. 영화는 9·11이 발생한 지 1년여인 2002년 여름쯤부터 그려진다. 주 무대인 새크라멘토는 세상 안전하지만 그래서 재미없고, 좁은 영역에서 먹고 살기는 힘든 그런 곳으로 은유 된다. 뉴욕은 테러가 일어났지만 새로운 성향과 생각들이 일어나는 진취적 세상으로 그려지고.
영화는 곳곳에서 2001년 뉴욕에서 발생한 테러로 보수로 회귀하던 당시 미국을 은근히 비판한다. 정치와 언론은 국민에게 잠재적 위험은 미리 제거해야 한다고 믿게 만들려 하고. 당시로선 신기술이었을 휴대폰으로 선량한 시민까지 통제하지 않을까? 라는 공포가 퍼지는 당시의 모습들을 풍자한다. 그래서일까? 크리스틴은 공화당을 싫어하고 ‘영화’는 공화당을 희화하는 은유가 곳곳에 숨어있다.
크리스틴에게 뉴욕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헤치고 가고 싶은 세상이다. 그녀에게 새크라멘토에서의 삶은 아직 알을 깨기 전 껍질 속에서 몸을 잔뜩 움츠리고 있는 병아리의 삶일 뿐. 뉴욕에 간다는 건 안전한 알을 깨고 나와 위험하지만 도전할만한 가치가 있는 세상으로 나가고 싶다는 꿈이다.
그래서 동부에서 찾은 것은?
뉴욕 도착 후 네 시퀀스가 이어지며 크리스틴을 움직인다.
노란색 ‘Legal Pad’에 빼곡히 적은 편지. 철자가 틀려서, 문법에 맞지 않아 구겨 버리고 차마 전하지 못했던 편지.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름을 “Lady Bird”가 아닌 ‘크리스틴’이라는 부모가 지어준 이름으로 소개하는 그녀. 거리를 걷다 들어간 성당에서 들은 ‘Rosa Mystica (신비로운 장미)’라는 성가. 집에 전화해 ‘자동응답기’에 남긴 메시지.
편지와 자동응답기는 커뮤니케이션이다. 다만 상대방이 반응했을 때 완성되는 커뮤니케이션이다. 편지는 상대방이 받아 읽어야 완성이 되고, 자동응답기도 상대방이 들어야 완성이 된다. 쓰레기통에 들어갔던 편지는 사랑이라는 우체부가 전달해서 읽게 만든다. 그 편지가 “Lady Bird”를 ‘크리스틴’으로 만들었다. 부모가 지어준 이름을 거부했던 소녀가 자기가 지은 이름을 포기하려 한다. 이제 딸이 되려 하는가?
성당에서 들은 ‘Rosa Mystica’는 ‘신비로운 장미’라는 뜻으로 신비로운 결합을 의미한다. ‘성모마리아’와 ‘예수’의 만남을 은유하는 것이다. 카톨릭 고등학교를 졸업한 크리스틴은 그 의미를 알았을 것이고. 엄마를 떠 올렸을 것이다.
아무도 없는 집에 전화를 건 소녀는 자동응답기에 메시지를 남긴다. “Lady Bird”도 아니고, ‘크리스틴’도 아닌 ‘딸’로서. 어쩌면 버려졌을 엄마의 편지를 읽고 재생해야 들을 수 있는 자동응답기에 남기는 딸의 답장. 그 메시지를 엄마는 듣게 될 것이다. 마흔두 살부터 딸의 엄마였을 엄마가.
부모가 준 이름을 부정하고 싶었던 소녀는 긴 여정 끝에 원래 이름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