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雜文)/에세이

꿈이었다고

vagabundo 2018. 3. 19. 14:35

꿈을 꾸었다. 글로 설명하기 아픈 꿈이었다. 아픔과 공포가 밀려와 목 놓아 울다 깼다. 되새기는 지금도 아프다. 꿈인 것을 알고는 몸의 긴장이 풀리며 안심했다.

 

꿈도 전염되는가?

 

잠시 후 아내가 나쁘거나 무서운 꿈을 꾸는지 몸부림을 치며 소리를 질렀다. 몸을 흔들어 깨우며 꿈이야, 꿈꾸는 거야해주었다. ‘꿈이야?’ 아내도 안도하며 자세를 편히 바꾸어 잠을 다시 청했다.

 

사람은 매일 꿈을 꾸지만, 대부분은 기억 못 한다. 기억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그 내용이 흐려진다. 지난밤 꾼 꿈은 잠에서 깬 지 몇 시간이 지나도록 생생하고 불안하다. 연이어 아내도 나쁜 꿈을 꾸었기에 더 찜찜하다. 가위에 눌렸을 뿐이라고 했는데도.



 

꿈에서 겪는 상황을 내가 통제하기는 어렵다. 꾸고 싶은 데로 상황이 흘러가지도 않는다. 현실에서 이루고 싶은 꿈을 이룰 수도 있지만, 상상하기도 싫은 상황을 맞닥뜨리기도 한다. 완벽히 통제할 수는 없지만, 평소 의식의 단면이나, 바람, 공포 등이 반영될 수는 있다고 한다.

 

티브이를 보니 어느 뇌과학자가 미신에 대해 강의를 하고 있다. 자신의 상황을 완벽히 통제하지 못할 때 미신을 떠올리고 징크스를 만든다고 한다. 꿈에서 나오는 상황을 내가 통제하기 어려우니 의미를 부여하려는 건 아닐까.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 아닐까? 라는.

 

30대를 지날 때까지 입대 영장을 다시 받는 꿈을 꾸었다. 변호사 친구는 사법고시를 다시 치르는 꿈을 꾸었고, 의사 아들은 국가고시에 떨어진 꿈을 꾸었다고 했다. 즐겁고 행복한 꿈보다는 공포와 관련된 꿈이 더 기억에 남는 것 같다. 잠은 어쩌면 가장 소중한 일상일 텐데 꿈 때문에 무서워지는 날이 올 것도 같다. 실제 어떤 친구는 악몽과 가위 때문에 잠드는 것이 무서워 치료를 받기도 했다.

 

요즘 잠에서 깨면 아! 꿈이 아니었구나!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지금 벌어지는 일들이 꿈이길 바라고, 자기의 주장이 진실이라고 믿고 싶은 사람들. 그들은 자신의 공적인 일상만 현실로 생각하고, 사적인 일상을 꿈처럼 지나면 흐려지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상대방에겐 차라리 꿈이었으면 했을 상황은 시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마음의 낙관으로 찍혀 있을 텐데.

 

눈과 귀로만 대하는 인간의 표면과 내면이 다르기에 벌어진 이 사단들. 파악이 어려운 내면이기에 드러나기 전에는 몰랐을 그 일들. 그들이 저지른 죄 마땅히 그들이 정리하고 단죄받아야 하지만, 치운 흔적은 다른 이들이 감당해야 할 몫으로 남을 것이다. 일련의 일들로 인해 분위기가 바뀌어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닐까 우려하는 사람들이 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거 쌤통이라는 듯이 논평하는 무리도 있고.

 

아직 군인들이 정권을 잡고 있을 때 대학을 다녔다. 그때 읽은 사회과학 책과 프린트에는 활동가와 지도자에 대한 구절이 많았다. 철학적으로 완성되어야 하고 인간적, 사회적으로도 완성되어야 한다는. 나는 물론 글로만 읽었고, 머리로만 익힌 활동가와 지도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핵심은, 노선과 프레임 이전에 인간이 먼저 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기억한다.

 

그동안 남의 눈의 티만 지적하고 내 눈의 들보는 보지 못했다면, 이제 내 눈의 들보를 먼저 수술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작은 티라도 찾아내어 지적할 수 있을 테니까. 꿈을 통제하기 어렵다지만 꿈에서도 현실처럼 봉사하고 싸우는 자세가 필요하다. 매번 선거 때마다 그들이 사랑하는 국민에게 그렇게 다짐하지 않는가?

 

꿈은, 꿈이라고 느낀 순간 억지로라도 눈을 뜨면 그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다. 현실은? 도망할 곳이 없다. 물론 잘못된 선택을 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무거운 게 아니라 무서운 거라고 가르쳐야 할 때다. 다시 돌아가는 건 상상하기도 싫지만, 이제라도 바로 잡아야 한다.

 

먼 훗날 진짜 어른이 되었을 때, 우리가 되찾고 새롭게 만들어온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워졌다고 광장에서 외칠 때, 우리의 아이들이 박수와 함성으로 공감해주는 그런 세상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긴 꿈이었지만, 이제는 깰 때다.